너무 방치하는 것 같아서,

Posted 2007.03.23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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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을 바꿨다.
물론 예전 것이 더 맘에 들긴 하지만
이제 좀 질리기도 했고
예전건 인터페이스가 좀 불편한 편이라.

피씨방이라 티스토리가 너무 빠르다!
우리집은 정말 속터지게 느린데ㅠ

역시 6년된 고물컴퓨터는 바꿔야하는건가. 하하

요즘은 방어기제로 '도피''합리화'를 많이 쓰고있다.
일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놀러나가고 싶고
더 미루게 된다. 어떡하지.

방학동안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리고 오늘 영어회화 한단계 패스했다.
댄은 다음코스를 통과하려면 두달이 걸릴거랬는데

한달만에 패스하는 기염을 토해보이겠어!!


+ 그림은 그냥 예쁘라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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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한 남자가 벌레로 변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속 가련한 주인공 그레고르의 이야기 이다. 인간 존재의 허무감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 이 소설에서 내가 찾아낸 것은 ‘인간은 결국 상호 협력 가능할 때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레고르는 은퇴한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 17살 난 어린 여동생을 돌보던 가장이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하고 싶어 하는 여동생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 고된 세일즈 일에도 불평한번 없었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손수 집을 마련할 만큼 가족에 헌신적이었다. 그는 그의 집안에 없어서는 안 될 기둥이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황당한 사건의 결말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만 점점 소외되어 가던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바짝 말라 죽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들 안에서 없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가 경제능력을 상실하고 더 이상 가족을 돌볼 수 없게 된 순간 가족들은 이미  그를 서서히 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가 어서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지만, 사회에는 이와 같은 맥락의 사건들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그레고르를 중세 봉건 시대의 성주라고 생각해보자. 왕을 위해 헌신하는 그레고르는 왕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측근의 배신으로 습격을 받은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한낱 거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한때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누구보다 자신을 생각해주던 그를 가엾이 여겨 그의 여생을 돌보아 주기로 한다. 처음 얼마간 왕은  그의 불행을 모두 털어내 주려는 듯 극진히 대해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왕은 그에게 베푸는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한다. 그가 먹는 음식이 아깝고, 그가 입는 옷이 아깝다. 급기야 그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며,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그가 진절머리 나게 보기 싫어진다. 얼마 후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인다.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가상의 일화는 현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레고르가 경제적인 도움을 준다면 왕은 자신의 군사로 그레고르의 신변을 지켜주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처럼 강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강국에 의해 타국의 위협으로부터 미연에 보호받는 것이 그러하다. 곧, 이러한 'Give & Take'적 공식이 성립되어야 사회적 협력 관계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가족들의 방치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단지 ‘그가 줄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어서’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남은 가족들은 그가 없어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고, 이제 그가 회복되지 않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어진 것이다. 가족들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순간 그는 이미 그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

사회 협력에 있어 위에서 언급한 ‘Give&Take’적 관계의 형성에 앞서 요구되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의 여부이다. 상호 협력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얻으며, 정신적 육체적 평안을 누린다. 바로 이러한 ‘서로에 대한 서로의 필요’라는 메커니즘이 우리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국가에 의한 보호의 대가로 세금을 납부하며, 취직하고자 하는 회사가 필요로 하는 영어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한다. 무관심 속에 죽어간 가련한 그레고르처럼 영원히 방치당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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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이기심'이란 키워드를 치고 엔터 키를 누르면 관련 검색어에 '미국의 이기심'이란 링크가 뜬다. 왜 하필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일까? 사실 이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다. 가족에 관해서도 ‘내 가족’ 이라는 말보다 ‘우리 가족’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한국인에게 미국식의 ‘my family'는 정서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부터 미국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국가라는 걸 눈치 채고 만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행동기반을 가질 수밖에 없고, 결국 이것은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감으로 이어진다. 공공의 이익을 미덕으로 여기며 ‘공동체적 삶’이라는 모토에 익숙한 우리는 사이좋은 사람‘들’ 싸이월드에서,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미국인들은 ‘my’ space.com에서 자신의 공간을 만든다. 사이트 명에서 조차 국민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기심의 표출에는 기본적으로 그 행위의 주체가 ‘상대적 강자’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여기 상대적으로 보나 절대적으로 보나 ‘최강자’인 미국이 군림하고 있다. 서류상으로만 아닐 뿐이지 ‘한국의 미국의 경제 식민지’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올 정도로 미국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나스닥 지수의 하락은 우리 서민경제의 폭락을 의미하고 ‘지원군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결코 강제적으로 들리지 않는 제안은 우리 젊은이들의 즉각적인 파견을 예고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같은 것이냐에 대해 개념정의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공중의 보편적인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는 위키피디아에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정의에 대해 각각 검색을 해보았다. 미국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기주의를 뜻하는 egoism은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결국은 개인적인 관심이 동기가 되어 행해진 것이라는 관점’, ‘개인적 흥미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사회적 관심에는 무관심한 개인’등으로 정의된다. 한편 개인주의를 뜻하는 ‘individualism’은 ‘도덕, 정치, 사회학적으로 인간의 독립과 개인의 자기신뢰,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와, 개인주의는 전체주의와 반대적 속성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조차 결국은 개인적인 관심이 동기가 되어 행해진 것’이라는 정의의 한 예로 대중교통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 행동은 분명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다’라는 평가와 자리를 비켜주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 자신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함으로써 심리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유를 두고 속된말로 ‘꼬였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에 와서는 이런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멀쩡히 있는 착한 사람도 이상한 사람을 만드는 이 꼬인 사상은 이제 케이블 TV와 헐리웃 영화, 인터넷 광케이블을 타고 우리에게도 침투해 ‘이기주의자는 똑똑한 욕심쟁이’쯤으로 여기는 쿨한 사회로 만들었다. 드라마속의 악녀는 더 이상 그냥 ‘못된 년’이 아닌 ‘매력녀’이다. 사람들은 사회라는 거센 풍파에 맞서 나하나 살겠다고 남의 불행이나 기분쯤은 털끝만치도 생각지 않는 ‘그’혹은 ‘그녀’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 뜻대로 일이 되어갈 때는 자신은 못하는 것을 해내는 그들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동정심에 사로잡힌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기적인 그들을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닌 ‘우리’ 그 자체의 일부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들 인간의 이기심이 ‘경쟁’을 낳았고 경쟁이 야기하는 위협에 대비하여 상호간의 합의하에 국가라는 체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법’이라는 것이 이기심의 표출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과거 이기심은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려던 것에 비해 적정한 범위 내에서의 이기심 표출은 사회를 발전시키고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윤활유가 되어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그토록 이기적이라 믿었던 미국의 사후재산 사회 환원율이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다는 것. 이런 행위도 사회로부터 칭찬 받고 싶고, 선행을 함으로써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되는 걸까? 아무렴 어떤가? 이런 이기심이라면 온 국민이 모두 이기주의자래도 상관  없을 것 같다. 태동하는 新에고이스트들에게 고한다. ‘베품의 미덕이 담긴 에고이즘을 행하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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