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의 재정립

Posted 2007.04.08 18:27

  '한 방울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혼혈아는 흑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백인과 흑인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제시카 알바나 윌 스미스를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법칙은 '돈'이라는 문제로부터 뻗어 나왔다. 그 옛날 봉건제도가 자리 잡고 있을 무렵, 서양에서는 흑인노예의 거래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노예=재산'이었던 그 시대에 백인인 주인과 흑인 노예 사이의 자식은 흑인으로 간주되어 노예시장에 팔렸다. 조부모, 부모가 모두 백인인 한 여성이 루이지애나 주로부터 조상 중에 흑인이 있다는 이유로 1/32가 흑인이므로,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는 판정을 받고 노예로 팔려나간 사례는 지금 들어도 놀랍다.


  그러나 우리나라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길을 지나다 우연히 본 혼혈인을 온전히 우리 ‘한국인’이라고 여긴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한국 땅에서 태어나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옷을 먹고, 한글을 배우고 자랐다 하여도 우리는 그들의 파란 눈, 곱슬머리, 짙은 쌍꺼풀에서 마음 속 깊이 거부감을 느낀다. 까만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졌지만 김치를 좋아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순이를 보고도 우리는 그녀를 한국인으로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무엇이 이들, 혼혈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여기고 그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도 쉽게 속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인종 차별 문제에 있어서도 백인 편을 들 수도, 흑인 편을 들 수도, 동양인 편을 들 수도 없는 어중간한 신세이다. 보편적으로 인류는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이렇게 단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나마도 황인종과 흑인종을 한 데 묶어 백인종과 유색인종이라는 대립된 구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데, 혼혈인들은 어느 편에도 마땅히 낄 곳이 없다. 몇 해 전 한 연예인이 오랫동안 부정해오던 혼혈아 여부를 인정하며 시끄러웠던 기자 회견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던 일은 이 땅의 혼혈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우리가 이토록 혼혈인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한민족’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설이면, 방송사에서는 ‘한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입니다’류의 멘트를 들을 수 있고, 초등학생들 또한 ‘한민족 공동체 의식 함양을 위한 글짓기’라는 대회에 의무적으로 참가해 ‘우리 민족은 하나다’라는 기저를 바탕으로 한 글을 훈련병 세뇌교육 받듯 쓰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민족’이라는 개념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 따져본다면 그것이 결코 오랜 옛날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족이란 개념은 전쟁을 위해 공동체를 하나로 모아야 할 때, 또는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결속력을 다져야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한 민족이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민족’이란 단어는 결코 ‘피’의 계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제 침략기 내부의 공동체 의식 함양을 위한 방안으로 만들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김새가 좀 다르다고 우리 민족 이외의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과거 고루한 사고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유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나치즘도 잘 생각해 보면 결국은 피의 문제가 아니다. 히틀러의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된 망령된 처사가 ‘민족주의’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합리화 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같은 피’를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는 이미 퇴색한지 오래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어떠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에서 생긴 것이라면 새롭게 변화한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민족주의’의 의미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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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쯤 대학 입시로 면접시험을 볼 때였다. 교대 면접인지라 질문 내용 또한 교육과 관련한 것이었다. ‘보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과정과 재능을 보이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에 관한 면접이었다. 평소 7차 교육과정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6차 교육과정과 7차 교육과정을 비교하며 보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이 백번 옳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면접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과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나는 결국 교수님의 입학 권유와 장학금도 뿌리치고 다른 학교를 택했다. 그저 대학 합격을 위해 점수에 맞춰 관심도 없는 교대에 지원했던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교육과정의 마지막 세대였던 나는, 입시에 실패하면서 7차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한 수능을 다시 봐야했다. 사실 사회에서 흔히들 지적하는 잦은 교육과정 변화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뀐 커리큘럼이 어떠한가.’ 이다. 우리나라의 잦은 교육과정변화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개선(改善)이 아니라 개악(改惡)이라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기본적인 목표는 사회 전반에 관한 일정 수준의 지식 습득을 통하여, 교육을 마친 학생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면 사안에 대해 적절히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그런데 7차 교육과정은 이 기본적인 목표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입시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우리나라의 고교 3년은 대학입시 준비를 위한 기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교육부에서 지정해준 과목의 수업시수를 채우기 위해 시간표상으로는 분명 '세계지리'인데 실제 수업에서는 '한국지리' 수업이 이루어진다거나, 문법 시간에 언어영역 문제집으로 수업을 나가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물론 교사들도 원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만 졸업생의 명문대 진학률로 그 학교의 수준이 판가름 나는 분위기에서 정석대로 하다간 도리어 학생이나 학부모들에게 욕먹기 십상이다.

   '교육은 나라의 근간'이라 할 정도로 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단순히 한 아이의 머리를 채워주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계층이 되었을 때 청소년 시절 받은 교육이 그의 사상과, 관점까지 모두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7차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이 불쌍하다. 아니 불안하다. 인문계열 아이들은 과학수업은 받지 않고, 자연계열 아이들은 사회수업은 받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수업을 받는 인문계열 학생들조차 배우고 싶은 과목, 수능을 볼 과목을 맘대로 정할 수 있다. 자연히 역사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국사나 근현대사와 같은 과목은 피하게 되고, 수능 성적을 잘 받기위해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 경제지리' 이런 식으로 과목을 연계하여 신청한다.

   당연히 사회에 관한 지식은 일부로 편중되고, 이는 이 아이들이 사회의 동력계급이 되었을 때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 자명하다.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동북 공정에 대해 아는바가 없어 헛소리만 내뱉고, 성인이 다된 자가 일기예보에 나오는 기압곡선 하나 볼 줄 모르는 광경도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이란 사람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한국인이란 사람이 자기네 땅덩어리가 어떻게 생겼나 도 모르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 TV나 신문에서 중얼대는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서 몇 퍼센트나 이해할 것이며, 기본적인 이해조차 불가능한 국민으로부터 과연 '여론'이라는 것이 조성될 수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사실 이제껏 이야기한 교육문제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원인은 바로 부적절한 임금 체계이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프랑스의 교육에 관해 빼놓을 수가 없다. 프랑스는 우리나라에 비해 대학 진학률이 매우 낮다. 그 이유는 대졸자의 임금과 고졸자의 임금이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버스기사와 대학교수의 봉급이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대학은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은,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진학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고 3 학생들이 오로지 수능 만을 바라보며 문제집 풀기에 여념이 없는 것에 비해, 이들은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만 모여서 바깔로레아 준비반에 들어간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꽃을 좋아하는 이는 꽃가게 아가씨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는데 그 어렵다는 바깔로레아를 보고 관심도 없는 전공공부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한국의 실태는 대학이라도 안나오면 저임금 직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해도 백조로 탱자 탱자 놀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이 나라의 교육체계를 입시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소가리지 않고 전공으로 택하는 '경영학'도 대부분 경영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관심도 없는 학문을 밥벌어먹고 살기 위해 공부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이 나라의 교육이 살기 위해서는 임금체계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사고방식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화이트칼라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한 계층이므로 그 대가로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블루칼라는 공부도 안하고 능력이 없는 계층이니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것.

   공부는 자신이 원해서, 자기 계발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어떤 보상을 바라고 억지로 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블루칼라가 새벽부터 해지도록 땀 쏟아가며 한 일이 화이트칼라가 펜대 굴리며 머리 쓰면서 한 일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면 임금은 그에 상응해야 한다. 화이트칼라 보다 못 배웠다는 이유로 그들의 노동이 저평가 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임금체계가 바로 잡힐 때 우리의 교육제도가 '사회 전반에 관한 평균적 이해가 가능한 시민'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이고, 교육제도의 정상화를 통해 비로소 우리나라의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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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참여'

Posted 2007.03.26 10:09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매도할 수도, 누군가에게 매도당할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를 선동할 수도, 누군가에게 선동당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나치즘이 장악하고 있던 독일의 이야기도, 안보국 요원들이 도처에 퍼져있던 197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여론의 현 주소이다. 

본래 여론은 시민혁명 전 프랑스의 한 관리가 부르주아들로 부터 자금을 얻기 위해 왕족이 아닌 그들에게도 약간의 정치 참여권을 부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현대의 절대적 가치 기준인 ‘돈’을 소유한 그들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부르주아 계층은 다소 천한 계급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이익에 상응한다거나 옳다고 생각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이 적극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형태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현대의 여론은 과거와 그것과 다르다.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현대의 민주주의는 과거 아테네의 참여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겪었던 여러 부작용(간접 선거, 공개투표, 독재정권, 무력제압 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은 ‘참여’라는 글자를 갈구하게 했다. 참여는 ‘나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길’이었으며, ‘잘 된 민주주의의 척도’로 비추어졌다.

 ‘참여정부’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 역시 인터넷 ‘노사모’를 통해 당선되었고 국정을 시작한 이래로도 늘 인터넷 여론의 영향을 받아오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측면에서는 분명 이로운 작용을 했다.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수치화 되어 보여 지는 결과는 ‘나의 의견이 반영된 정확한 결과’라는 기분을 갖게 했으며 그것이 나의 의견과 다르던 같던 간에 결국 ‘다수의 의견을 표명하는 명약관화한 자료’로 보여 졌으므로 이를 부정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 일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재작년 우리나라와 일본이 한참 독도 영유권 문제로 다툴 때 CNN.COM 에서 이루어졌던 설문조사가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독도는 한국 땅이다’ vs ‘독도는 일본 땅이다’라는 두 가지 선택항이 있었던 그 설문은 일본 측의 압도적 우세였다. 90% 이상의 세계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하는 한국 네티즌들이 그 사실을 무시했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화가난 한국의 네티즌들은 포털 사이트나 인기 사이트, 인기 카페, 클럽 등을 통해 투표 참여하기 운동을 했고, 당연히 그 참여율은 엄청났다. 하지만 총 투표수의 대부분이 한국인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설문 결과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사건은 소위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그 각종 설문, 통계 조사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실제로 국내에서 조차 포털사이트가 여론을 조작한다는 주장이 들끓고 있다. 이에 따라 몇몇 인기 포털 사이트는 뉴스 섹션을 대폭 축소하는 일도 있었다.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화한 것이 분명 긍정적인 것임에는 확실한 것처럼 보다 많은 시민들이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은 분명 잘 된 일이다. 그러나 논의 하고자 하는 사항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는 사람들도 모두 참여하는, (인터넷의 익명성 덕분에 소위 ‘초딩’들도 여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논의 자체에 의미가 없는 그런 한심한 글들조차도 ‘여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에 포장되어 우리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하였으니. ‘지식과 판단력을 갖춘 진정한 public’이 아닌 부피만 큰 집단인 ‘공중’ (여기서 ‘공중’은 공중 화장실, 공중도덕, 공중전화 등의 단어에서 통용되는 ‘공중’이라 보면 되겠다.)에 의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뒤바뀌는 정치인들의 줏대 없는 입놀림도 결국 우리 ‘참여’로 부터 나온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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