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보니 지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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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화가나서' 라기보단..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얘기하다보니 또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쏟아져 나와서 블로그에 미친듯이 갈긴적이 있다.
장문의 글을 쏟아내었지만 아직도 미완의 글이고,
할말은 아직도 산더미 같은데 어떻게 마무리하는게
좋을지 도무지 몰라 내버려 두었다.
그냥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오해는 금물이다.
보이는게 다는 아니니까.
(그래도 사람은 보이는대로 평가받도록 설계되어 있나보다.)
그 장편의 미완성 글,
한창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TV, 신문, 서점가 등 각종 매체를 점령했을때도, 대치동 아주머니들이 '대치동 아줌마의 자녀 교육법' 따위의 타이틀을 내건 책들을 쏟아냈을때도, 나는 모든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부터 쭉 보아온 대치동은 TV나 각종 여성잡지, 신문들이 떠들어대는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아니, 다른게 아니라 뭔가 잘못됐다.
"아침 7시경, 버튼을 눌러 빵을 주문한다. 같은 시각 베이커리 주방에서는 모짜르트 음악을 들으며 숙성된 반죽이 오븐에 들어가 식빵이 되어 나온다. 다 구워진 따끈한 식빵은 주문한 집으로 배달된다."
타워팰리스가 처음 들어서고 부의 상징=타워팰리스 였던 시절. 신문에서 이와 비슷한 문구를 읽었다. 물론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정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글쓴이를 잡아다 말싸움이라도 하고 싶었다. 글쎄, 내가 잘 몰라서 그런걸까. 내가 아는 한에서는 23년 평생 대치동에 살았어도 저렇게 사는 사람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적부터 같이 커왔던 이들은. 그리고 고백컨데 나도 저 글에서 언급된 모짜르트 식빵을 먹어보았지만 그저 포장지에 '모짜르트 식빵'이란 이름이 붙어 있을 뿐 상상하는 것 처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격이 비싼 것도 절대로 아니었고. 모짜르트 식빵은 '좋은 음악을 듣고 자란 식물이 몸에 좋다' 류의 실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하나의 아이디어 상품에 불과한데 왜 이것이 도곡동의 사치의 상징으로 묘사된건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어린 시절. 철모르던 때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지금도 '치맛바람'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모교 출신 아이들이 대부분 진학했던 중학교의 경우 과고, 외고, 민사고에 학생들이 하도 많이 들어가서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하다. 우리 동네에 오래산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미도 아파트에 가서 땅 자랑하지 말고, 선경아파트 가서 현금자랑 하지말고, 우성아파트 가서 직업자랑 하지 말라'였던가. 언급한 이 세 아파트 사이에 위치한 우리 초등학교는 정말 치맛바람의 천국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게 청소를 할때면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흰 봉투를 들고 찾아 오시는 어머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초등학교에서 촌지가 가장 성행한다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아예 통장을 만들어 매달 입금해 준다더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심했다.
그에 비해 별로 넉넉지 않았던 우리 집은 그 흔한 촌지 한 번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4학년 까지는 음식 솜씨 좋으신 어머니께서 선생님들이 모두 나눠드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도시락을 일년에 두어번 가져다 주신 것 때문에 비교적 편안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돈을 가져다 주진 않았지만 당시엔 나름대로 각종 글짓기 대회, 사생대회, 경시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모범생이었기에. 하지만 5학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너도 고학년이 되었으니 엄마가 안찾아가도 알아서 잘 할거라 믿는다' 라는 선포를 하시며 학교에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신 것. 지금 생각해도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나는 당시 이것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깐깐하고
돈밝히는 담임선생님은 틈만나면 불러다가 '작년 네 담임 선생님께 듣기로는 어머니가 찾아오시기도 했다던데 왜 아직까지 한 번도 안오시냐. 너에게 관심이나 있으신거냐.' 등의 소리를 반 아이들 다 있는데서 교탁앞으로 불러다가 하면서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주시길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확히는 그냥 학교에만 찾아오시는게 아니었겠지만. 괴롭히면 오기가 나서 더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있던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때부터 조금씩 비뚤어졌다. 물론 기껏해서 반항이라고 한다는 것이 '수업시간에 막대사탕 먹기'정도의 소심한 것이었지만 어쨋든 나는 그때부터 예전처럼 공부를 열심히하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별로 산뜻하지 못한 기분으로 진학한 중학교는 또 가관이었다. 맨 처음 말했던 그 특목고 사관학교가 아니라 '산부인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불온했던 학교에 배정된 것. 나를 포함해 전교에 다섯 뿐이었다. 다섯이서 부둥켜 안고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렇게 진학한 중학교는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우선 나는 첫 등교때 부터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대보다는 무슨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고 입학고사로 본 시험 결과는 더욱 충격이었다. 5,6 학년 내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등수가 나와서 엉겁결에 학급 임원 선거에 나가게 되었고 부반장이 된 것.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꾸짖고 괴롭히면 달아나고 칭찬하고 책임을 지워주면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타입인지라 다시 모범생 모드로 곧장 복귀하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중학생의 임신'같은 불미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강남에 있는 52개 중학교 중 우리학교가 50등' 이라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특목고 진학률은 정말 안좋았다. 나역시 대원외고에 지원했었지만 떨어졌고 결국 우리학교에서는 외고는 단 한명도 가지 못했으며 과고 역시 한명인가 진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에 비해 아까 말했던 특목고 사관학교는 외고, 과고, 민사고를 모두 합쳐 100명 가까운 인원을 입학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나의 기억이 너무 과장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겟다.)
외고입학에 실패하면서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 고등학교에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많아서 마침 초등학교 친구들 소식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는데 같은 반에 있던 친구 중에 대단한 인물이 참 많았더라. 꽤나 친했던 누구는 한국 ○○○ 사장 딸이었고, 누구는 ○○제화, 누구는 ○○페인트 회장 손자 이런 식이었다. 허기는 90년대 후반에 겨우 초등학생이 North Face나 ENC, SYSTEM 따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당황스럽다. 그래서 친구는 나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며 '애들이 모두 겉늙었다. 애다운 맛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봐도 우리 학교에서 꽤나 잘나간다던 아이들의 복장은 지금봐도 하나도 촌스럽지가 않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대치동의 교육열', '대치동의 집 값', 대치동의 극성 아줌마' 따위의 이미지들이 과연 이들로 부터 파생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난 아니라고 본다. 대치동의 교육열, 그래, 어쩌면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현금부자, 땅부자에 각종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부모님들이 난무하는 동네에 교육열이 약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대치동의 집 값, 이것도 사실 수긍이 잘안간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대치동 집 값은 분명 강북에 비해 비싸긴 했지만 지금 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살았던 아파트도 1억2~3천 만원 이었고 웬만큼 살만하다는 아파트도 3억선 이었으며 위에 말했던 선경이나 우성아파트도 48평이 5억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내가 2년정도 살았던 삼성아파트는 38평이 11억에 육박한다. 선경, 우성아파트도 이제는 노후되어 값이 떨어질만도 한데 낡을대로 낡은 48평대 아파트 한채가 12억이 훌쩍 넘어간다. 강북의 아파트들이 1~2억대에서 4~5억대로 겨우 오른것과 달리 대치동의 아파트 값 상승율은 가히 폭발적이다. 하지만 무엇이 대치동의 아파트 값을 이렇게 까지 오르게 했는가.
나름 원인 분석한 결과 대치동 집 값의 상승요인에는 언론의 부채질로 인한 이주수요의 증가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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